산업 전장의 베테랑에서 도심의 신사로···랜드로버 디펜더

산업 자동차 야! 타 볼래

전장의 베테랑에서 도심의 신사로···랜드로버 디펜더

등록 2026.10.28 16:33

권지용

  기자

각진 차체·스페어타이어··· 70년 넘게 이어온 정체성400마력 직렬 6기통 엔진·에어 서스펜션···힘과 승차감 조화험로 주파 능력·일상 주행 편안함···오프로더의 진화

랜드로버 디펜더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생김새만큼이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농장과 산업 현장에서 일하던 다목적차로 출발해 여러 나라 군대의 작전 차량으로 활약했고, 이제는 첨단 편의장비와 강력한 엔진을 갖춘 고급 SUV로 거듭났습니다. 과거 디펜더가 어디든 달려갈 수 있는 차였다면, 오늘날 디펜더는 어디를 달리더라도 운전자가 편안하기를 바라는 차입니다. 이번에 만난 디펜더 110 P400 X는 그 변화가 어디까지 왔는지 보여줍니다

랜드로버 디펜더 110. 사진=랜드로버랜드로버 디펜더 110. 사진=랜드로버

초기 디펜더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이 차가 처음 등장했던 1980년대 초, 짧은 차체는 랜드로버 90, 긴 차체는 랜드로버 110으로 불렸죠(90, 110은 휠베이스 길이를 인치로 나타낸 숫자입니다). 이 친구가 곧 랜드로버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디펜더라는 이름은 1990년에 붙었죠. 1980년대 회사가 어려움을 겪을 때도 꾸준한 인기로 브랜드를 지탱했고, 2015년까지 큰 틀의 디자인을 유지하면서 오랫동안 사랑받았습니다.

지금의 디펜더는 과거 전장을 누비던 군용 자동차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첨단 편의장비와 고급스러운 실내를 갖췄고 강력한 엔진까지 얹었습니다. 이번에 살펴볼 디펜더 110 P400 X는 최고출력 400마력을 발휘하는 가솔린 모델인데요. 진흙탕과 바위밭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차가 도심에서도 편안하게 달린다면 어떨까요. 과거의 흔적은 그대로인데, 능력은 한층 넓어졌습니다.

디펜더의 매력은 일단 외모에서 시작합니다. 네모반듯한 차체와 수직으로 떨어지는 앞뒤 끝단, 차체 바깥쪽에 자리 잡은 스페어타이어까지. 요즘 SUV가 매끈한 차체와 날렵한 지붕선으로 역동성을 강조한다면 디펜더는 정반대입니다. 바람을 가르는 날렵함보다 어디든 밀고 들어갈 것 같은 듬직함을 앞세웁니다. 자동차 디자인에도 유행이 있지만 디펜더는 유행을 따라가기보다 자기만의 문법을 고집하는 쪽입니다. 그런데 이 오래된 문법이 지금은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랜드로버 디펜더 인테리어. 사진=랜드로버랜드로버 디펜더 인테리어. 사진=랜드로버

실내로 들어가면 반전이 시작됩니다. 겉모습만 보면 불편함을 감수하고 타야 할 것 같은데, 운전석은 현대적인 SUV답게 편의장비와 기능을 갖췄습니다. 투박한 형태를 일부러 감추지도 않습니다. 기능적인 구조와 단단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일상에서 필요한 편안함을 챙겼습니다. 고급스러움을 보여주기 위해 번쩍이는 장식을 늘어놓기보다는 차의 성격에 맞는 재료와 구성을 택한 모습입니다. 디펜더의 실내는 화려한 호텔 라운지보다는 잘 정돈된 탐험가의 작업실에 가깝습니다. '비싼 차라고 해서 모두 반짝거릴 필요는 없다'는 모 누리꾼의 말이 떠오르는군요.

P400 X의 핵심은 이름에 들어간 숫자 400입니다. 3.0L 직렬 6기통 가솔린 엔진에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결합해 최고출력 400마력, 최대토크 56.1kg·m를 발휘합니다. 8단 자동변속기와 사륜구동 시스템을 갖췄고,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데 6초면 충분하죠. 차체가 크고 무거운 오프로더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제법 빠릅니다.

이런 차를 타면 으레 힘부터 확인하고 싶어집니다. 가속페달을 밟았을 때 얼마나 시원하게 튀어나가는지, 엔진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말이죠. 하지만 디펜더의 매력을 출력 숫자 하나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400마력은 분명 넉넉한 힘이지만, 이 차가 스포츠카처럼 운전자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종류의 자동차는 아닙니다. 높은 차체와 넓은 시야, 묵직한 존재감이 만들어내는 여유가 더 중요한 성격입니다.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사실보다 필요할 때 힘을 꺼내 쓸 수 있다는 든든함에 가깝습니다.

랜드로버 디펜더 110. 사진=랜드로버랜드로버 디펜더 110. 사진=랜드로버

직접 타보니 디펜더의 반전은 승차감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각진 차체와 큼지막한 바퀴를 보면 노면 충격을 그대로 받아낼 듯하지만, 막상 달려보면 생각보다 부드럽고 편안합니다. 에어 서스펜션이 노면의 요철을 걸러내면서 차체 움직임을 안정적으로 잡아줍니다. 그렇다고 물렁물렁하게 출렁이지도 않죠. 차체가 높은 대형 SUV인데도 불필요한 흔들림을 잘 억제해 장거리 주행에서도 부담이 덜합니다. 진흙길과 바위밭을 구를 능력을 갖췄으면서도, 굳이 모험을 떠나지 않는 날에는 편안한 이동 수단으로 제 몫을 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디펜더의 매력은 험로를 달릴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험로를 달릴 수 있는 차를 굳이 험로에 데려가지 않아도 만족스럽다는 데 있습니다. 대부분의 운전자가 매일 만나는 것은 진흙탕보다 출근길 정체이고, 바위투성이 계곡보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입니다. 디펜더는 두 세계를 모두 품으려 합니다. 물론 큰 차체는 좁은 골목과 주차장에서 부담이 될 수 있고, 강력한 가솔린 엔진은 경제성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에게 적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차를 원하는 사람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꼭 필요한 기능만 따진다면 자동차의 선택지는 훨씬 단순해질 테니까요.

랜드로버 디펜더 110. 사진=랜드로버랜드로버 디펜더 110. 사진=랜드로버

디펜더는 최신 기술로 무장한 화려한 히어로라기보다 오랜 세월 현장을 누빈 베테랑에 가깝습니다. 굳이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떠들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 제 몫을 해내고, 평소에는 편안하게 우리 곁을 지킵니다. 전장을 누비던 과거의 이미지와 도심을 달리는 오늘의 모습이 한 차 안에 공존하죠. 모든 자동차가 목적지까지 가장 효율적으로 가는 수단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차는 그저 바라보고, 타고, 함께 길을 나서는 일 자체가 즐거워서 선택할 테니까요. 디펜더는 그런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꽤 설득력 있는 자동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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