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후반,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던 자본시장에서 나는 한 증권사 반포지점 신입사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쯤 옛 근무지를 찾았다가 소름이 돋았다. 20여 년 전 객장에 앉아 계시던 고객들 상당수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계셨던 것이다. 그동안 돈 좀 버셨느냐고 여쭤봤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때 재미 본 것에 코가 꿰어 아직 못 떠나고 있어요. 그새 아파트 한두 채 값은 날렸을라나···" 한때 그분들의 투자 상담을 맡았던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투자가 아니라 투기를 상담해 드렸던 것이다.
투기와 투자는 다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투기적 상인을 "한 가지 사업에 정착하지 못하고 올해는 곡물, 내년에는 포도주를 좇는 자"라고 했다. 벤저민 그레이엄은 "철저한 분석에 근거해 원금의 안전과 적절한 수익을 약속하는 행위가 투자이며, 이 요건을 채우지 못하면 전부 투기"라고 잘라 말했다. 케인스는 시장의 심리를 맞히려는 것이 투기요, 자산이 그 수명 동안 벌어들일 수익을 내다보는 것이 투자라고 했다. 기준이 이토록 간명한데 사람들은 왜 투기에 빠져드는가.
2008년 케임브리지대 연구진이 런던 금융가의 트레이더들을 관찰했더니, 수익이 좋은 날엔 테스토스테론이, 시장이 요동친 날엔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이 치솟았다. 연구진의 해석에 따르면 연승은 '승자 효과'로 테스토스테론을 더 끌어올려 과잉 확신과 무모한 위험 감수를 낳고, 연패는 만성적인 코르티솔 상승으로 판단을 왜곡한다. 이기든 지든 호르몬은 사람을 시장에 더 깊이 묶어 놓는다. 도박 중독의 메커니즘 그대로다. 스마트폰으로 매일 시세를 좇아 사고파는 사람들은 카지노에 가지 않았을 뿐, 사실상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1년여의 한국 증시가 꼭 그랬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방아쇠였지만, 상법 개정과 '코스피 5000'으로 상징되는 민주당 정부의 증시 부양 정책도 분명 한몫했다. 2500선 안팎을 맴돌던 코스피는 한때 9000선을 넘봤다가 지금 7000선으로 내려와 있다. 그사이 단일 종목 레버리지 상품에 뭉칫돈이 쏠렸고, 서킷브레이커가 잇달아 발동하는 폭락장도 겪었다. 80년대 후반을 몸으로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서 기시감을 떨치기 어렵다. 그러나 개인의 호르몬만 탓할 일이 아니다. 국민을 객장으로 불러 모은 것은 절반쯤 제도의 책임이기도 하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언젠가 슈퍼사이클이 저물고, 상법 개정이 겨냥했던 지배주주의 탈법·편법적 사익편취가 또 다른 창의적 우회로로 부활한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어김없이 되돌아올 것이다.
더 근본적인 모순도 짚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정강정책의 뼈대는 약자 보호, 소득 양극화 해소, 노동권과 지구 환경 보호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이 밀어붙이는 전통적 주주자본주의는 바로 그 정강과 충돌할 공산이 크다. 코스피가 오를수록 주식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는 벌어지고, 주주가치가 절대선이 되면 기업은 분기 및 연간 실적 극대화에 내몰려 환경·종업원·협력사·지역사회를 위한 지출을 '비용'으로 밀어낸다. 정강 따로, 자본시장 정책 따로인 셈이다.
답이 없는 것도 아니다. 2006년 전면 개정된 영국 회사법 172조는 주주가치를 추구하되 이해관계자의 이익과 장기적 가치를 함께 배려하라는 '계몽된 주주가치(Enlightened Shareholder Value)'를 명문화했다. 상법을 이 방향으로 재개정하고, 더 많은 국민이 단타꾼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장기 주주로 시장의 과실을 나누게 하는 것. 그것이 민주당이 정강과 정책을 정합시키는 길이다.
시장의 체질도 손봐야 한다. 한국은 선진국은 물론 일본, 대만과 비교해도 기관투자가 비중이 너무 낮고, 그 기관들마저 단타 위주로 운영한다. 대표적 장기투자자여야 할 국민연금조차 위탁운용사를 단기 성과 잣대로 줄 세운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시세조종과 불공정거래도 여전하다. 현 정부가 근절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내가 입사했던 80년대 후반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을 만큼 이 대목에서 여전히 한국 시장은 후진적이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가 금융교육의 부재다.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국민 대부분은 성인이 돼서야 증권사 PB와 유튜버, SNS, 심지어 공중파 방송에서 '교육'을 받는다. 그런데 이들이 가르치는 것은 대개 금융이 아니라 마켓 타이밍을 잡아 사고파는 법, 곧 투기하는 법이다. 그러니 우리 국민의 투자는 투자가 아니라 사실상 도박이 되고 만다. 도박은 달콤하지만 그 끝은 늘 쓰다.
월가의 풍자가 프레드 슈웨드는 "투자와 투기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사랑에 빠진 10대에게 사랑과 욕망이 다르다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고 썼다. 지난 1년 단기매매로 재미를 본 이들의 몸속에선 지금도 테스토스테론이 왕성하게 분비되고 있을 터, 따라서 이 글이 먹힐 리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쓴다. 40년전 반포지점 그분들에게 정작 필요했던 것은 종목 추천이 아니라 객장을 떠나라는 권유였다. 섹터별 최우량 기업의 주식들을 사서 잊고 살았더라면 아파트 한두 채 값을 날리는 대신 벌었을 것이다.
진짜 투자는 내 돈으로, 충분히 따져보고, 안전마진을 확인한 뒤 사서, 시세를 자주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다. 호르몬을 이기려 애쓸 게 아니라 호르몬이 끼어들 여지를 없애는 것이다. 밤을 잊은 채 국장·미장 시세를 좇는 이들이 내 옛 고객들보다는 조금 일찍 그 자리를 떠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민주당 정부가 국민을 객장이 아니라 진짜 투자로 이끄는 제도를 만들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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