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제약·바이오 시장에서 인공지능(AI) 경쟁의 무게중심이 바뀌고 있다. 1막이 컴퓨터 연산으로 후보물질을 빠르게 찾아내는 '소프트웨어 속도전'이었다면, 2막은 '실제 실험 데이터(Wet-lab Data)'의 축적과 검증이다. 아무리 좋은 데이터가 존재한다고 해도 실제 생체 검증 과정인 '실제'가 없으면 신약으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글로벌 빅파마들의 행보는 이 방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노보 노디스크와 BMS가 앤트로픽과 손을 잡고, 일라이 릴리와 로슈가 엔비디아와 최대 10억 달러 규모의 협력을 맺었다. AI 분석과 물리적 실험을 잇는 시스템 구축에 나선 것이다.
특히 앤트로픽은 자체 실험실을 차려 실험 자동화를 추진 중이다. AI가 아무리 정교한 가설을 내놓아도, 생체 내에서 작동하는지 검증하고 모델을 다시 가다듬을 '실험 데이터'가 없이는 임상 문턱을 넘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내 기업들의 사정은 어떨까. 글로벌 빅테크와 빅파마들과 경쟁을 하기에는 자본과 연산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 경쟁 자체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상태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국내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현실적인 전략을 택했다. 바로 '선택과 집중'이다.
국내 기업들은 자신들이 오랜 기간 갈고닦은 특정 질환과 타깃 분야에 AI를 도구로 결합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한미약품은 펩타이드 설계 경험과 활성 데이터를 AI와 결합해 비만 치료제(HM17321) 도출 속도를 끌어올렸고, 보로노이는 인산화효소 선택성 분석 데이터와 뇌혈관장벽(BBB) 투과 예측을 결합해 기술력을 증명했다.
모든 영역에 뛰어들기보다 강점이 있는 파이프라인의 발굴·최적화에 AI를 집중 투입해 개발 시간과 비용을 실질적으로 줄여내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글로벌 빅파마들이 주목하는 지점도 바로 이처럼 잘 정제된 실제 실험 데이터다.
물론 이러한 방식도 한계가 존재한다. 개별 바이오텍에 한정된 데이터만으로는 모델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 대학, 병원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데이터 풀을 구조적으로 넓혀야 한다. 특히 과거에 실패해 묻어두었던 실험 데이터까지 체계화해 다음 연구의 시행착오를 줄이는 자산으로 전환해야 한다. '누가 더 정교한 가설을 세우느냐'가 아니라, '누가 검증된 데이터를 쥐고 있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K-바이오가 노려야 할 최종 목표는 자체 실험 역량과 질환별 독자 데이터를 통해 글로벌 빅파마와 AI 기업의 '대체 불가능한 연구 파트너'로 자리 잡는 것이다.
정부의 지원 역시 단순 소프트웨어 개발비 지원을 넘어 병원과 연구소의 실패 데이터까지 하나로 엮는 실질적 인프라 구축으로 향해야 한다. 내부의 데이터를 체계화하고 닫힌 실험실의 문을 열어 연대하는 것, 이것이 글로벌 빅파마의 러브콜을 이끌어내고 기술이전이라는 진짜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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