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박사 유언, 평사원 출신 전문경영인 발탁 역사사원지주제·기업공개 등 투명성으로 산업계 기준 제시기업 이익, 장학·교육·복지 사업으로 환류되는 구조
딸에게 땅을 남겼다. 그런데 조건이 붙었다.
"이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미고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라. 유한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해 달라."
유한양행 창업주 고(故) 유일한 박사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언이다. 명목상 혈육에게 땅을 물려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사유재산으로 쓰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가족에게 남긴 재산조차 사회의 몫이 되길 바랐던 이 장면은, 거창한 창업 신화보다 유한양행의 지난 100년을 훨씬 더 깊게 설명해 준다. 그는 회사를 세웠지만, 회사를 자기 집안의 소유로 두지 않았다.
오는 20일 창립 100주년을 맞는 유한양행은 한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이질적인 존재다. 단순히 100년을 버틴 제약사라서가 아니다. 유한양행은 창업주 일가가 경영권을 대물림하지 않았고, 공익재단과 학교법인이 주요 주주로 남아 있으며,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이끈다. 한국 기업사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오너 기업'의 문법을 정면으로 거스른 셈이다.
통조림 대신 택한 제약업
그 시작은 1926년 서울 종로였다. 당시 유 박사는 미국에서 숙주나물 통조림 회사 '라초이(La Choy)'를 공동 창업해 이미 청년 갑부 반열에 오른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대로 미국에 남았다면 탄탄대로가 보장된 삶이었지만,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돌아왔다. 병은 흔했고 약은 터무니없이 비쌌던 시대, 외국 약품과 일본계 자본이 장악한 유통망 속에서 조선인들은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는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누릴 수가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유한양행은 단순히 약을 사고파는 상업 자본이 아니라, 나라 없는 시대에 국민의 몸을 지키겠다는 문제의식의 산물이었다. 사명인 '유한(柳韓)'은 자신의 이름과 한국인이 세운 회사라는 뜻을 섞었고, '양행(洋行)'은 서양 문물을 취급하는 근대식 무역회사를 의미했다.
유한양행을 상징하는 '버드나무(버들표)' 로고에도 창업주의 지향점이 묻어 있다. 귀국 전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를 찾아가 회사 설립 계획을 밝히자, 서 박사가 딸에게 부탁해 버드나무 목각품을 선물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한민족에게 그늘과 희망을 주는 기업이 되라는 당부였다.
창립 초기 행보 역시 파격의 연속이었다. 약값과 품질을 믿기 어렵던 시절, 성분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정찰제를 고수했다. 신문 광고에는 제품명 대신 버드나무 상징을 크게 싣거나 "의사는 당신의 친우"라는 카피를 내세워 의사의 진단 후 약을 복용하라고 권장했다. 약을 많이 파는 것보다 함부로 오남용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라는 원칙이었다.
1933년 아내 호미리 여사(의사)의 조언을 받아 자체 개발한 소염진통제 '안티푸라민'은 이런 원칙 아래 탄생한 첫 대표 상품이다. 배가 아프면 배에 바르고 코감기에는 코 밑에 발랐다는 옛 이야기가 돌 만큼, 안티푸라민은 귀했던 약의 자리를 대신하며 국민 상비약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오너 경영 틀 깬 파격, 전문경영인 체제 안착
유한양행의 궤적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유 박사의 또 다른 이력을 펼쳐봐야 한다. 그는 기업가이기 전에 뼛속 깊이 독립운동가였다. 1919년 재미 한인 대표들이 모인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결의문 기초를 작성했고, 1945년에는 미 전략첩보국(OSS)의 한반도 침투 작전인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에 핵심 요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 백만장자 CEO가 캘리포니아 훈련 캠프에서 고강도 군사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은 훗날 미국 기밀문서가 해제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그에게 기업과 조국 독립은 별개의 가치가 아니었다. 국민의 몸을 살리는 일,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 일, 양질의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 곧 애국이었다. "기업은 사회 이익 증진을 위해 존재하는 기구"라는 그의 지론은 회사의 덩치가 커질수록 구체적인 제도로 굳어졌다.
유한양행이 한국 기업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도 이러한 성장 이후 궤적에 있다. 회사의 규모가 커질수록 창업주는 소유권을 움켜쥐는 대신 나누는 방식을 택했다. 1936년 주식회사로 전환하며 직원에게 주식을 나눠주는 사원지주제를 선제적으로 시행했고, 1962년에는 제약업계 최초로 기업공개(IPO)를 단행해 '자본의 대중화'와 회계 투명성을 확보했다.
결정적 변곡점은 1969년 주주총회였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유 박사는 부사장까지 지낸 장남(유일선) 대신 평사원 출신의 조권순 전무에게 1대 전문경영인 자리를 물려줬다. 당대 관행을 고려하면 장남 승계가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그는 과감히 혈연의 고리를 끊었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선언한 이 파격적인 결정은 훗날 유한양행만의 흔들림 없는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까지도 유한양행은 대표 임기 제한과 내부 승계 시스템을 통해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유 박사는 이후 아들에게 "대학까지 가르쳤으니 혼자 살아가라"며 자립을 요구했고, 아내에게도 딸의 도움을 받아 노후를 보내라는 뜻만 남겼을 뿐 회사의 지분이나 경영권을 넘기지 않았다.
ESG 선취한 환원 시스템과 '글로벌 신약'이라는 새 과제
창업주의 사회 환원은 일회성 미담이나 기부에 그치지 않고 '시스템'으로 제도화됐다. 유 박사는 생전에 보유 주식을 공익 기관에 기증했고, 사후에도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이 유산을 바탕으로 설립된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은 현재까지 유한양행의 주요 주주로 남아, 기업이 창출한 이익이 고스란히 장학·교육·복지 사업으로 환류되는 지배구조를 완성했다. 최근 들어 이는 전 세계 산업계의 화두인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이미 반세기 전에 선취한 독창적 모델로 평가 받는다.
물론 이 100년의 궤적을 맹목적으로 미화할 수만은 없다. 오너 없는 전문경영인 체제가 과감한 투자나 신속한 의사결정에서 늘 정답일 수는 없는데, 실제로 한때 유한양행은 도입 의약품 판권에 의존해 수익성이 낮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창업주의 도덕성'이라는 거대한 유산도 후대 경영진에게 큰 자산이자, 동시에 뛰어넘어야 할 무거운 압박이다.
이제 유한양행의 시선은 새로운 100년을 향하고 있다. 100년 전 유한양행의 과제가 값비싼 약을 구하지 못하는 국민에게 필수의약품을 공급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과제는 혁신 신약 개발을 통한 글로벌 대형 제약사 도약이다. 회사는 특히 국산 신약인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렉라자(Leclaza)' 이후 '제 2의 렉라자'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유한양행 측은 회사 창립 100년을 맞이해 웹툰 'NEW 일한'을 제작하고 유튜버 김선태와 협업하는 등 기념 사업을 펼치고 있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창립 100주년은 지난 100년간 유한양행을 사랑해주신 고객들과 함께 만들어온 뜻깊은 역사"라며 "앞으로도 유한양행은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바탕으로 국민 건강 증진과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지속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뉴스웨이 이병현 기자
bottlee@newsway.co.kr
저작권자 © 온라인 경제미디어 뉴스웨이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