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업계에 따르면 이날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는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본사에서 기자 간담회를 가졌다. 전날 박 대표는 지주사의 인사 강등 조치에도 불구하고 본사로 정상 출근하며 '독자 경영' 뜻을 밝히는 성명문을 언론에 두 차례 발표했다. 박 대표는 이날도 기자들과 만나 독립 경영 의지를 확고히 밝혔다.
박 대표는 "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임종훈)가 주주총회 결의를 거치지 않고 상법상 업무집행권이 보장된 대표이사 측 권한을 축소하거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결정 등에 의하지 않고 직무수행을 제한할 권리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법무법인 자문 자료를 배포하면서 대주주 3인 연합과 긴밀히 소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대표는 지난 28일 인트라넷에 박 대표에 대한 인사 강등 조치를 발표했다. 박 대표 지위를 전무로 변경하고 지방에 있는 제조본부로 관장업무를 한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같은 날 박 대표가 대표 직속 경영관리본부를 신설하고 인사팀과 법무팀을 별도로 꾸리겠다는 내용의 인사조치를 발표한 것에 대한 경질성 조치다.
임 대표 측은 한미약품 측의 이같은 움직임을 대주주 연합의 회사 장악 시도로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까지 한미약품 내엔 별도 인사 조직이 없었고, 지주사에 관련 업무를 위임했다. 임 대표 측은 특히 법무팀 리더로 선임된 권순기 전무가 자문사 라데팡스 출신으로, 1차 경영권 분쟁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한미사이언스 측은 별도 인사조직을 신설한 박 대표 조치가 "기존 인사프로세스를 따르지 않아 무효이고 인사권 남용"이라며 박 대표에 대한 강등 조치는 "회사를 지키고 외부 세력을 퇴출하기 위한 인사"라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한미 모든 그룹사는 인사발령 시 (한미사이언스) 인사팀을 경유하고 지주사 대표이사 협의 후 진행했다"며 "박 대표가 지주사의 동의는 물론 이사회 논의조차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인사조직 신설을) 진행한 것은 중대한 절차상 흠결"이라고 했다.
반면 한미약품과 박 대표 측 설명은 이와 달랐다.
박 대표는 30일 간담회에서 권 전무가 외부 인사라는 주장은 "프레임 씌우기"라며 선을 그었고, 지주사 인사팀과 대표를 거쳐 인사발령을 진행한 기존 프로세스 역시 "주주를 위한 일이 아니고, 종속회사 이사회 결정 권한을 축소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 한미약품 측은 이번 인사조직 신설 등 변경된 경영 조치와 관련해 임 대표와도 한 차례 협의했다고 지난 29일 설명했다.
이는 박 대표 측이 임 대표에게 찾아가 대주주 3인 연합 측 의사라며 조직개편안과 분리경영 조치에 대해 일방적으로 통보했다는 임 대표 측 설명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양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며 진흙탕 싸움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자회사 대표에 대한 경질성 강등 조치와 이에 맞선 자회사 독립경영 선언 등이 며칠 사이 연달아 벌어지는 보기 드문 사태에 대해 업계는 오너 일가 내 불화와 경영권 분쟁이 전면전으로 재점화된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지난 3월 한미사이언스 주주총회에서 형제 측이 모녀 측에 완승을 거둔 후 임종훈·송영숙 한미사이언스 공동 대표 체제가 출범하며 한미약품그룹 경영권 분쟁은 종결되는 듯했다.
다시 분쟁의 불씨가 지펴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4월로, 공동 체제 출범 후 임원 인사를 둘러싸고 임종훈 공동대표와 송영숙 공동대표 간 의견차가 발생했다. 당시 업계에서는 송 회장 측근으로 평가받는 인물에 대한 해임 조치가 송 회장 반대로 불발되며 갈등이 이어졌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임 대표는 결국 공동대표 체제 출범 40일 만인 지난 5월 14일 송 회장을 해임했고, 한미사이언스는 임종훈 단독 대표 체제로 변경됐다. 이후 지난 6월 18일 열린 한미약품 임시 주총에서 임종윤·종훈 형제가 한미약품 사내이사직에 선임됐으나, 이사회가 열리지 않아 임종윤 이사의 한미약품 대표이사 선임은 불발됐다. 임시주총에 이어 곧장 이사회가 개최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인 만큼 이미 이때부터 경영권 분쟁 불씨가 꺼지지 않은 것 아니냐는 추측이 업계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실제로 다음 달인 7월 3일 송영숙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 모녀는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에게 한미사이언스 지분 6.5%(444만4187주)를 매도하고 의결권을 공동 행사하기로 계약하며 다시 경영권 분쟁에 뛰어들었다.
신동국 회장은 앞서 1차 경영권 분쟁 당시 형제 손을 들어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한미약품그룹 창업자인 고 임성기 회장의 고향 후배로서 14년 넘게 한미사이언스 지분 12%대를 유지한 개인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신 회장이 돌연 변심해 모녀 측으로 돌아선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한미약품그룹 발전을 위한 대승적 결단" 때문으로 알려졌다. 신 회장이 모녀 측 지분 매입 직후 '전문경영인 체제' 등을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오랜 기간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주식을 엑시트(투자금 회사) 하기 위한 행보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지만, 신 회장이 한양정밀 포함 4개 비상장 계열사 지분을 쥐고 1000억원대 배당금을 뽑아 쓸 수 있는 재력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에서 큰 개연성이 없는 추측이라는 반박도 동시에 나왔다.
실제로 신 회장은 다음 달 3일 644억원을 동원해 송 회장 지분 2.55%를 사고, 한양정밀에서 1000억원을 추가로 투입해 송 회장 지분 3.22%와 임 부회장 지분 0.73%를 인수할 예정이다. 한양정밀에 누적된 이익잉여금은 1300억원 수준으로, 신 회장은 지난 2020년에도 한양정밀에서 배당금 1130억원을 받아간 바 있다. 다만 이번에는 배당금을 받아 모두 개인 명의로 매입 금액을 지급하는 대신 절세 차원에서 회사 주식과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한양정밀 명의로 지분 매입을 진행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주주 연합이 결성된 이후 사태는 더욱 숨 가쁘게 전개됐다.
한미약품은 지난달 7일 북경한미약품과 코리그룹 간 부당내부거래 의혹에 대한 내부감사를 시작했다. 의혹은 북경한미약품 생산 의약품에 대한 중국 유통을 코리그룹 산하 북경룬메이캉(北京潤美康)이 담당하는 과정에서 일감 몰아주기 등 부당거래가 있었다는 내용으로, 홍콩 코리그룹은 임종윤 이사가 지분 100%를 보유한 기업이다.
같은 달 9일 임종윤 이사가 대주주인 디엑스앤브이엑스(DXVX)는 이용구·권규찬 DXVX 대표이사 명의 입장문을 통해 "북경한미와 코리그룹의 부당 내부거래 의혹은 사실관계 확인이 부족하고 왜곡된 추측성 보도"라며 적극 해명했다.
반면 박 대표는 이미 7월 5일 임원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진위 여부를 떠나 많은 우려를 나타내는 분이 많았다"며 "기사에 언급된 내용들에 대해 정확한 사실관계를 일차적으로 확인하고 필요시 추가적인 조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해 입장차를 드러냈다.
이어 지난달 8일 송영숙 회장은 한미약품그룹 경영 일선 퇴진을 선언하며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송 회장 발표 이틀 뒤 임종윤 이사는 신동국 회장을 만나 가족 간 분쟁 종식과 함께 불협화음이 봉합됐다고 선언했지만, 한미사이언스와 한미약품의 대표이사 유지·변경 여부 등 구체적 사안은 언급되지 않은 불안한 화합이었다.
결국 지난달 29일 대주주 3인 연합은 한미사이언스에 임시 주주총회 소집을 청구했다. 형제 측이 과반을 차지한 지주사 이사회 구성을 다시 대주주 연합 측에 유리하게 변경하는 것이 내용의 골자로, 2차 경영권 분쟁이 다시 '표 싸움'을 통한 전면전으로 치닫는 모습이었다.
임종윤·종훈 형제 측은 한 달이 넘게 침묵을 지키다 지난 26일에야 내용증명에 대한 회신으로 "요건도 갖추지 아니한 임시 주주총회 소집청구서를 보냈다고 갑자기 경영권 분쟁이 현실화되는 것은 아니"라며 "신동국 등 주주들은 경영상 필요에 의한 투자유치 방해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말했다. 해당 답신에서 형제 측은 대주주 연합 측 움직임을 '투자유치를 방해하는 배임행위', '회사 업무방해', '주주 간 계약위반', '국세청에 대한 기망행위' 등으로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 달 사이 불안한 화합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달 26일 소액주주연대 요청에 따라 면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임주현 부회장은 형제를 경영에 참여시키겠다는 신 회장의 '하이브리드 경영' 관련 질문에 대한 즉답을 피하면서도 "각자 어떤 역할을 하겠다고 못 박긴 어렵지만 맡은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역할 분명하다면 충분히 고려해서 결론 내릴 것"이라고 가능성을 열어뒀다.
임종윤 이사 측 역시 임시주총 요구가 날아든 뒤인 지난 7일에도 "한미사이언스 경영권 소유 주주(이하 주주)들 간 협약을 통해 회사의 경영권을 공유하는 경영공동체를 결성하고자 한다"는 내용의 '경영공동체 선언문'을 공개하기도 했다. 다만 당시 대주주 연합 측은 구체적인 내용이 오진 않았다면서, 따로 밝힐 입장이 없다고 설명했다.
현재로서는 모든 물밑 협상이 수포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박재현 대표 인사를 둘러싼 갈등과 임시 주주총회 소집 등 주요 현안에 대해 양측 모두 대화나 협상보다는 '정식 절차'를 밟겠다고 선언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임종윤 한미약품 사내이사는 "자회사 독자 경영은 불가능하다"며 다음 달 2일 한미약품 대표 및 북경한미 대표 선임을 안건으로 임시 이사회 개최를 소집한 상태다. 이사회를 통해 박 대표를 해임하고 자신이 한미약품 대표에 오르겠다는 취지로 보인다.
그러나 한미약품 현 이사회는 3자 연합 측 7인 대 형제 측 3인 구조로, 근본적으로 이사회 구성을 바꿔 한미약품 독립경영을 막아서기에는 한계가 있다.
대주주 연합 측에서도 완전한 경영권 장악을 위해서는 형제 측 5인 대 대주주 연합 측 4인으로 구성된 현 한미사이언스 이사회 구성을 바꿀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임시 주주총회를 개최할 필요가 있다. 임종훈 대표가 임시 주총 소집 요청을 거부한 상태지만, 상법상 주주는 법원에 주총 소집 허가 결정을 요청할 수 있다. 한미사이언스 지분 절반 가량을 보유한 대주주 제안인 만큼 법원에서도 주총 소집 허가 결정을 내릴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현재 대주주 연합 측은 과반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주주 연합 측은 48.19%의 지분을 확보한 반면 임종윤·종훈 형제 측은 우호 지분 포함 29.07%에 불과한 상황인데, 한미약품 측은 "3자 연합은 우호 지분까지 더해 현재 한미약품그룹 지분의 과반 수준을 확보한 상태"라고 말했다. 소액주주연대와 국민연금 또한 대주주 연합 측에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신 회장과 소액주주 연대 등을 끌어들이며 진땀승을 거뒀던 형제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애초에 분쟁의 불씨가 됐던 상속세 문제 역시 모녀 측은 이번 지분 매각을 통해 해결했지만, 형제 측은 아직 뚜렷한 방안을 찾지 못했다.
송 회장 측은 지난달 지분 매도 사실을 알리며 "송 회장과 임 부회장은 상속세 납부 재원을 마련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임종윤·종훈 형제의 남은 상속세는 900억원대 안팎으로 추정된다. 임 대표는 지난 13일 소액주주연대와 가진 면담에서 "단기적인 자금 수요 충족 및 채무 경감을 위해서도 투자 유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해 투자 유치 외에는 뚜렷한 상속세 재원 마련 방안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뉴스웨이 이병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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