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험은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제도다. 사람들은 사고, 질병, 사망, 화재 같은 일이 생겼을 때 보험회사가 약속한 보장을 해줄 것이라고 믿고 보험료를 낸다. 그래서 보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다. 보험소비자보호도 결국 이 신뢰를 지키는 일에서 출발한다.
우리나라 보험시장은 규모 면에서는 이미 상당히 커졌다. 많은 국민이 생명보험, 손해보험, 실손보험, 자동차보험에 가입해 있다. 그러나 보험금 지급을 둘러싼 분쟁, 약관 해석 문제, 불완전판매, 보험민원은 계속 발생하고 있다. 보험을 많이 가입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보험을 충분히 신뢰하는 나라가 되었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단순히 보험회사의 민원처리나 판매현장의 설명 부족으로만 볼 수는 없다. 더 근본적으로는 보험계약을 규율하는 법체계가 오늘날의 보험 현실과 소비자보호 요구를 제대로 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나라 보험계약법은 독립된 법률이 아니다. 현재 상법 제4편 보험편에 포함되어 있다. 상법은 기본적으로 상인의 영업활동을 규율하는 법이다. 보험회사가 회사 형태로 보험사업을 한다는 점에서 상법 안에 보험계약 규정이 있는 것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험계약은 일반 상거래와 다르다.
보험은 우연한 사고를 전제로 한다. 계약기간이 길고 약관은 복잡하다. 소비자는 보험회사가 가진 정보와 전문성을 모두 알기 어렵다. 어떤 경우에 보험금을 받을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받을 수 없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보험계약은 단순한 상품 구매가 아니라 미래의 위험을 맡기는 장기적 계약이다. 따라서 보험계약에는 일반 상거래와 다른 독자적인 법체계가 필요하다.
대부분 금융선진국은 이미 보험계약법을 독립된 법률 또는 별도의 보험법 체계로 운영하고 있다. 독일은 보험계약법을, 프랑스는 보험법전 안에 보험계약 규율을 두고 있다. 일본도 2008년 보험법을 제정해 상법에서 보험계약 관련 규정을 분리했고 2010년부터 시행했다. 중국도 보험법을 단행법으로 제정해 운영하고 있다. 주요국들이 보험계약을 별도의 법체계로 다루는 이유는 분명하다. 보험계약이 일반 상거래와 다르고 소비자보호가 매우 중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일본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일본은 보험법을 독립시키면서 소비자보호를 중심에 두었다. 대표적인 변화가 고지의무다. 과거에는 보험계약자가 스스로 중요한 사항을 찾아 보험회사에 알려야 했다. 그러나 일반 소비자가 무엇이 중요한 사항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일본은 보험회사가 질문한 사항에 소비자가 답변하면 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소비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기보다 보험회사가 필요한 정보를 분명히 묻도록 한 것이다.
보험금 지급 시기에 관한 규정도 마련했다. 소비자가 보험금을 청구했을 때 언제까지 조사하고 지급해야 하는지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보험금 지급이 늦어지면 소비자는 경제적 어려움과 불안을 겪는다. 일본은 보험금 지급 절차를 법으로 정리해 소비자가 예측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었다.
보험수익자와 피해자보호도 강화했다. 사망보험계약이 보험계약자의 채권자 등에 의해 해지될 위기에 있을 때 보험수익자가 일정 금액을 지급하고 계약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책임보험에서도 피해자가 보험금으로 우선 피해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이처럼 보험계약법 독립은 법률의 위치를 바꾸는 형식적 문제가 아니다. 소비자가 보험계약에서 어떤 권리를 갖는지, 보험회사가 어떤 의무를 부담하는지, 보험금은 언제 어떻게 지급되어야 하는지, 분쟁이 생겼을 때 어떤 기준으로 해결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하는 일이다. 보험계약법 독립은 소비자의 권리와 보험회사의 의무를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보험소비자보호와 직접 연결된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보험소비자보호 논의는 주로 판매단계에 집중되어 왔다. 설명의무, 적합성 원칙, 불완전판매 방지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소비자가 보험을 신뢰하는 순간은 가입할 때만이 아니다. 오히려 보험금을 청구할 때 보험의 가치가 확인된다. 지급 기준이 불투명하고 약관 설명이 어렵고 면책사유가 납득되지 않는다면 소비자는 보험을 신뢰하기 어렵다.
따라서 보험소비자보호는 판매단계의 규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계약의 성립, 유지, 변경, 해지, 보험금 지급까지 전 과정에서 소비자의 권리가 분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보험계약법을 독립된 법률로 정비해 계약질서를 명확히 세워야 한다.
보험산업의 발전은 더 많은 상품을 파는 데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비자가 이해할 수 있는 계약, 납득할 수 있는 보험금 지급, 예측 가능한 분쟁해결 기준이 있어야 한다. 보험계약법 독립은 규제를 하나 더 만드는 일이 아니라 보험소비자가 계약의 권리주체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다.
최미수 서울디지털대학교 세무회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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