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부·환경부·지자체 중복규제에 기업 '진땀'이해관계 충돌하면 타협 시까지 신사업 발목 강영철 "국민 위해 규제 시스템 재정비해야"
'종합 6위, 제도적 환경 24위.' 유엔 산하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의 2024년 세계 혁신지수 조사에서 우리나라가 받아든 성적표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혁신을 추구하지만, 정부는 그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달리 말하면 과도한 규제 환경이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얘기다.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잠재력마저 잃어가는 한국 경제. 뉴스웨이는 '세계기업가정신 주간'을 맞아 기업인들의 혁신 활동을 옭아매는 규제 정책의 현 주소를 진단하고 개선 방향을 제언한다. [편집자주]
1990년대 김영삼 정부 이후 역대 정부마다 규제 개혁을 국정과제로 내걸고 여러 시도를 이어왔지만, 현장의 기업은 여전히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환경·안전 등에 대한 사회적 요구 수준이 커지는 가운데 동일한 사안을 여러 부처가 2중 3중으로 들여다보는 이른바 '중복규제' 행태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어서다.
재계 전반에선 기업의 신사업 진출을 저해하는 요인 중 하나로 부처 간 중복규제를 지목하며 개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지속되고 있다.
사전적 정의는 없지만, 중복규제는 하나의 피규제자 또는 행위에 대해 다수의 규제권자가 존재하는 현상이다. 즉, 특정 사안과 관련해 두 개 이상의 부처가 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내용의 보고의무가 중복돼 있거나 비슷한 검사·교육이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사례, 상충되는 규제가 혼재하는 상황 등을 들 수 있다.
기업은 공장 하나를 지을 때도 여러 부처를 돌아야 한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환경부, 국토교통부, 지역자치단체는 기본이고 경우에 따라선 해양수산부 그리고 국방부로부터도 법률에서 정한 대로 사업의 타당성을 검증받아야 하는 탓이다.
법제처는 2008년 펴낸 보고서에서 부처 간 모호한 경계를 중복규제 발생의 주된 원인으로 꼽았다. 기술의 융합, 경제의 복잡화와 맞물려 비슷한 업무를 여러 부처가 담당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할권이 겹치는데, 이 과정에서 복잡한 환경이 만들어진다는 분석이다.
당연히 기업 입장에선 달갑지 않다. 모든 부처의 눈높이를 맞추는 데 상당한 시간을 쏟아야 할 뿐 아니라 비용도 이중으로 부담해야 해서다. 설령 각 주체가 엇갈린 이해관계로 충돌하기라도 하면 사업은 성공을 낙관할 수 없게 된다.
삼성과 SK가 추진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케이스가 대표적이다. SK하이닉스의 경우 2019년 2월 일찌감치 부지를 선정했음에도 내년 3월에나 공사에 착수한다. 계획대로라면 2022년엔 첫 삽을 떴어야 했지만, 지역사회의 민원과 토지 보상, 용수 공급 인허가 등 사안에 번번이 발목을 잡혔다.
삼성전자도 비슷하다. 용수 확보와 관련해 평택시와 용인시가 묵은 갈등을 풀기까지 적잖은 시간을 썼다. 물 공급처로 낙점한 송탄취수장이 두 도시에 걸쳐있는 상수원보호구역이기 때문이다. 지난 46년간 평택시는 줄곧 상수원을 보호하겠다는 입장이었고, 용인시는 사유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송탄취수장 운영 중단과 보호구역 해제를 주장하며 맞섰다. 이는 정부와 경기도의 중재 끝에 평택시가 국가 미래산업 육성에 동참하겠다며 크게 양보하면서 일단락됐다.
과거 삼성전자는 평택에 세계 최대 반도체 공장을 건립할 당시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전기를 변환해 평택 공장에 공급하는 송전선로가 안성·용인·평택을 지나는데, 해당 지역 주민과 정치인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난항을 빚었다. 2013년 건설 계획을 수립한 '고덕~서안성 송전선로'는 결국 10년 뒤인 2023년에야 완공됐다.
다른 산업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식음료 기업 역시 하나의 제품을 내놓기 위해 환경부부터 식약처에 이르는 여러 부처와 소통해야 한다.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 통신사가 동일한 위법 행위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와 옛 통신위원회로부터 따로 조사받고 이중으로 과징금을 낸 극단적인 일화도 있다.
그럼에도 각 부처는 경쟁적으로 관할 영역을 넓히고 규제도 확대하는 실정이다. 자신들의 권한이 줄면 위상도 작아진다는 인식에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2015년 보고서에서 중복규제가 해소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를 예산과 직결되는 소관 업무나 규제 권한의 축소를 원치 않는 정부 부처의 속성에서 비롯됐다고 짚었다.
이렇다 보니 전문가들은 정부 차원에서 중복규제를 해소하고자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필요시 특별법을 제정하더라도 일단 서로 다른 기준을 일원화하고 비슷한 규제를 통폐합함으로써 기업의 부담을 덜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행정부처간 협의·심의·조정절차 의무화해야 한다고도 조언한다.
강영철 좋은규제시민포럼 이사장은 뉴스웨이 창간 12주년 기념 비전포럼에서 "정부가 부처간 이견으로 사업 인허가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기업에 또 다른 투자 기회를 빼앗는 것과 같다"면서 "인허가 절차를 일원화하는 등 중복·유사 규제를 정비해 국민을 위해 기능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스웨이 차재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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