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가 처음 생산한 제품은 1910년 주세페 메로시가 디자인에 참여한 알파 24마력이다. 이후 40마력, 60마력의 제품을 추가했고 1911년 성능 입증을 위해 자동차경주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알파 공장은 국가의 요구로 군수용 부품을 만들었다. 이때 최고 경영자로 참여한 인물이 나폴리의 기업가 니콜라 로메오다. 니콜라는 1918년 전쟁이 끝나자 다시 자동차 생산을 재개했는데 내심 탐탁치 않았지만 전쟁 전에 남은 자동차 부품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20년 토르페도 20을 내놓으며 사명도 알파 뒤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알파로메오로 변경했다.
알파로메로의 이름 알리기는 이때부터 본격 전개됐다. 페라리 창업자인 레이서 엔초 페라리가 각종 레이스에서 알파로메오 차종으로 상위권에 올랐기 때문이다. 1923년 사비오 경주에서 우승했고 이듬해는 3개 대회 출전, 모두 우승의 쾌거를 달성했다. 유럽 전역에 알파로메오의 고성능 명성이 퍼지는데 엔초 페라리의 역할이 컸던 셈이다. 물론 엔초 페라리의 은퇴 후에도 알파로메오의 고급, 고성능 이미지는 계속돼 1933년에는 2900B TYPE 35로 다양한 경주에 출전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고성능 레이싱에 치중한 나머지 1980년대에 재정이 악화돼 결국 피아트의 품에 안겼다.
흥미로운 점은 알파로메오의 미국 진출이다. 1950년대 중반 유럽 내 명성을 등에 업고 미국에 진출한 알파로메오의 마지막 미국 수출은 1995년 끝났다. 하지만 피아트와 크라이슬러가 손을 잡자 2006년 미국에 다시 발을 들이게 됐다. 그리고 이때부터 알파로메오의 한국 진출 소문이 급속히 퍼졌지만 끝내 수입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스텔란티스코리아가 알파로메오의 한국 도입에 나서면 좋겠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듯 하다. 짚과 푸조로만 구성된 제품은 시장 확대에 한계가 있는 데다 알파로메오 마니아도 있으니 말이다. 페라리를 제외한 이탈리아 차종이 모두 한국 시장에서 실패를 겪은 탓에 고민도 있지만 알파로메오의 틈새 시장 안착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게다가 일부 제품은 이미 개별적으로 수입, 유통된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물론 뚜껑은 열어봐야 한다. 2002년과 2017년에도 도입 얘기가 있었지만 결국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의 소문이 오히려 기대감을 높이는 역할도 했다. 한 언론사가 국내 도입을 바라는 수입차 브랜드를 조사했더니 알파로메오가 단연 1위에 오른 바 있어서다. 게다가 일부 소비자는 알파로메오를 경제적인 페라리로 여긴다는 응답을 하기도 했다. 엔초 페라리의 레이싱 DNA가 형성된 원천이 곧 알파로메오였기 때문이다. 결정은 기업이 하겠지만 소유와 공유가 공존하는 모빌리티 시대에 소유욕 또한 커져감을 고려할 때 도입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뉴스웨이 차재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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