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달 9일 고려아연 임시주주총회가 열린다. 집중투표에 의한 독립이사 및 분리선출 감사위원 선임을 놓고 영풍·MBK파트너스 연합과 최윤범 회장 측이 또다시 표 대결을 벌인다. 지분은 MBK·영풍 측이 약 41%, 최 회장 측이 약 38%로 MBK 측이 다소 앞선다.
세계 최대 비철금속 제련기업의 경영권 다툼을 보며 미국 러스트벨트와 영국 미들랜즈의 녹슨 굴뚝이 떠오른다. 국가 기간산업의 지배권과 자본의 회수 논리가 충돌할 때 국가는 어떤 기준으로 개입해야 하는가. 시장은 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금융이 앞설 때
미국과 영국 두 나라의 제조업 쇠퇴에는 공통된 배경이 있다. 단기 수익률과 주주환원이 경영의 지배적 기준이 되면서 장기 설비·기술·인력 투자가 후순위로 밀렸다는 것이다. 금융 투자 논리가 산업 논리에 앞설 때였다.
영국의 마이클 키슨과 조너선 미치는 제조업 쇠퇴의 핵심 원인으로 만성적 과소투자와 단기 수익을 우선한 금융 논리를 꼽았다. 미국의 윌리엄 라조닉도 미국 기업전략이 '유보하고 재투자하라'에서 '다운사이징하고 분배하라'로 바뀌었다고 비판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S&P 500 기업 474곳은 2012~2021년 순이익의 55%인 5조7,000억달러를 자사주 매입에, 41%인 4조2,000억달러를 배당에 썼다.
하지만 반론도 들어야 한다. 하버드대의 제시 프리드와 찰스 왕은 신주 발행 등으로 주주로부터 다시 조달한 자본도 함께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분석에서 2007~2016년 S&P 500의 총 주주환원은 순이익의 96%였지만, 주식발행을 반영한 순 주주환원은 약 50%였다.
이 반론은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는 미국 기업 전체를 더한 평균일 뿐이다. 평균이 괜찮아도 산업별로 보면 사정이 다르다. 애플, 알파벳 등 빅테크의 연구개발비가 사상 최고 수준이라는 점이 제련·철강처럼 거대한 고정설비와 숙련인력을 요구하는 제조업의 국내 투자까지 담보하지는 않는다. 자본은 환원했다가 다시 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어도, 한 번 끊긴 생산 생태계와 숙련은 되찾기 어렵다.
5년의 시계, 30년의 산업
금융의 총아라 불리는 사모펀드는 부실기업 회생과 지배구조 혁신에 기여할 수 있다. 문제는 회수기간과 수익구조가 장기 산업의 시간표와 충돌할 때다. 사모펀드는 펀드 만기 안에 성과를 실현해야 하고, 그 과정상의 부채 활용, 자산 매각, 배당, 재매각은 그들에게 정당한 기법이다. 그러나 대규모 장치산업과 결합하면 질문이 달라진다. 설비 보전과 증설, 환경·안전 투자, 인적 투자, 기술 축적이 단기 현금흐름에 밀릴 위험은 없는가.
홈플러스는 이 위험의 전형적 경고 사례다. MBK는 2015년 기존 차입을 포함해 약 7조2,000억원 규모로 홈플러스를 인수했다. 인수금융 규모는 MBK 측 설명(약 2조7,000억원)과 신용평가사 추산(약 4조3,000억원)이 엇갈리지만, 인수대금의 상당 부분이 차입이었다는 점은 같다. 이후 점포 매각과 재임차가 이어졌고 2025년 회생절차를 신청했다. 높은 금융부담과 자산유동화가 영업기반을 잠식한다는 우려는 현실이 됐다.
제련소는 대형마트와 또 다르다. 제련업의 경쟁력은 토지와 건물이 아니라 안정적 조업, 축적된 공정기술, 숙련인력, 원료 조달과 판매망의 결합에서 나온다. 더구나 고려아연은 국내 유일의 안티모니 생산기업이며, 중국의 수출통제 이후 안티모니의 방산·반도체 공급망 전략성은 한층 커졌다.
그렇다고 현 경영진의 지배권을 무조건 보호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너 경영의 사익편취와 전횡은 엄격히 견제돼야 한다. 다만 그 방법이 기간산업의 장기 투자능력을 저해해서도 안 된다. 경영진의 책임성과 산업기반의 지속가능성은 양자택일이 아니다. 어렵지만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을 길을 모색해야 한다.
미국도 시장에만 맡기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주주자본주의의 본산 미국도 전략자산의 지배권 이동을 시장에만 맡기지 않는다.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는 외국인의 미국 기업 지배권 취득을 국가안보 관점에서 심사하고, 위험을 완화할 수 없으면 대통령에게 거래 금지를 권고한다. 다만 CFIUS는 외국인 투자가 대상이므로 국내 자본 간 분쟁인 고려아연 사태에 그대로 적용될 제도는 아니다. 필요한 것은 미국 제도의 차용이 아니라 우리 산업구조와 현실에 맞는 창의적 설계다.
첫째, 외국 자본의 핵심기술·인프라 지배권 취득 심사를 부처 간 통합해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둘째, 국내외 자본을 불문하고 국가핵심기술, 전략광물, 핵심 공급망을 가진 기업의 지배권이 일정 수준 이상 이동할 때는 경제안보 영향평가를 거치게 해야 한다. 셋째, 심사의 결론은 일률적 금지가 아니라 조건부 승인일 수 있어야 한다. 국내 설비투자와 고용·연구개발 유지, 핵심기술 해외 이전 제한, 과도한 차입과 자산매각 제한 같은 조건을 거래에 붙이는 방식이다.
물론 이 제도가 경영권 방어의 방패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독립적 심사기구와 공개된 기준, 일몰조항, 사법적 통제를 갖춰야 경제안보를 명분으로 한 경영진 보호주의를 막을 수 있다.
30년 시계를 가진 자본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심사와 조건은 지배권이 이동하는 순간에만 작동하지만, 기업의 시간표를 매일 결정하는 것은 주주다. 5년의 시계를 가진 자본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30년의 시계를 가진 자본이다. 장기투자를 견지하고, 재무 지표뿐 아니라 ESG와 총요소생산성 같은 지속가능성 요소를 함께 평가하며, 스튜어드십 원칙에 따라 경영진과 꾸준히 대화하는 책임투자자가 그들이다. 이들의 저변이 넓어져야 분기 이익 중심의 전통적 금융투자 논리가 시장의 지배적 목소리가 되지 않는다.
그 출발점은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요 기업 대부분의 주요 주주이자 고려아연의 주요 주주이며, 동시에 MBK를 비롯한 사모펀드의 출자자이기도 하다. 한쪽 손으로는 펀드의 회수 수익을 기대하고, 다른 손으로는 피투자기업의 장기 가치를 요구하는 이중 지위는 제대로 쓰이면 자본시장 전체의 시계를 늘리는 지렛대가 된다.
출자자로서는 운용사의 회수 방식에 장기 산업의 기준을 요구하고, 주주로서는 의결권 행사의 근거를 공개하며 경영진과 인수자 모두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국민연금이 단기 수익률로만 평가받는 한 그 아래의 운용사와 기업도 같은 시계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국민의 노후자금은 본래 가장 긴 시계를 가진 돈이다. 그 돈이 가장 긴 시계로 투자하게 만드는 것이 책임투자의 시작이다.
배당은 달콤하지만 국가는 길다
주주환원은 결코 죄가 아니다. 배당과 자사주 매입은 경영진에게 자본 효율의 규율을 부과한다. 문제는 주주환원과 단기 수익률을 기업가치의 최우선 척도로 삼는 태도다. 전략 제조업의 가치는 다음 분기 다음 해의 이익만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위기 때 공급망을 지킬 능력, 기술을 이어갈 사람, 장기 투자를 버틸 재무구조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이번 임시주총에서 누가 이기든 한국 자본시장에 남는 과제는 같다. 경영진의 책임성을 강화하는 거버넌스 개혁, 전략산업의 지배권 이동이 경제안보에 미칠 영향을 투명하게 심사하는 제도, 그리고 그 제도가 작동하지 않는 평상시에도 기업의 시계를 장기로 잡아줄 책임투자자의 저변이다. 셋 중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견제 없는 경영진은 안주하거나 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 있고, 심사 없는 지배권 이동은 산업의 근간을 흔들며, 장기 자본 없는 시장은 제도가 만든 조건을 지켜낼 힘이 없다.
자본은 국경을 넘지만 설비와 기술인력, 공급망이 빚어내는 산업역량은 쉽게 옮겨지지 않는다. 미국과 영국이 너무 늦게 깨달은 이 사실을, 우리가 같은 경로를 따라 동일한 비용을 치르고 배울 필요는 없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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