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차는 투자 부담↓···배터리는 생산 주도권↑ESS·신규 고객사로 활용도 확대···AMPC 효과도 기대
국내 배터리 3사가 북미에서 완성차 업체와 손잡고 세운 합작법인(JV)을 잇달아 단독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전기차 호황기에는 안정적인 물량을 담보하는 안전판이었던 JV가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의 장기화로 오히려 생산능력을 특정 고객사에 묶어두는 제약으로 작용하기 시작하면서다.
겉으로 보면 완성차 업체가 전동화 투자 부담을 배터리 업체에 넘기는 모양새다. 그러나 배터리 업계의 계산은 다르다. 공장을 단독으로 확보하면 특정 고객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전기차와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이에서 생산 물량과 제품 구성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전기차 시장이 팽창하던 시기에는 '물량 확보'가 경쟁력이었지만 성장세가 꺾인 지금은 '생산의 자율성'이 새로운 경쟁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배터리 업체와 완성차 업체가 JV를 꾸린 것은 전기차 시장의 고성장을 전제로 한 선택이었다. 배터리 업체는 막대한 설비투자 부담을 분담하고, 완성차 업체는 안정적인 배터리 공급망을 선점할 수 있었다. 공장을 착공하기도 전에 일정 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은 배터리 업체에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전기차 성장세가 예상보다 급격히 둔화하면서 이 구조의 약점이 드러났다. 특정 완성차 업체의 전기차 판매가 감소하면 해당 JV 공장의 가동률도 함께 떨어진다. 감가상각비와 인건비 등 고정비는 생산량과 무관하게 발생하는데 줄어든 물량을 다른 고객의 주문으로 대체하기도 쉽지 않다. 호황기에는 든든한 수요처였던 완성차 업체가 불황기에는 생산능력을 제약하는 족쇄가 될 수 있는 셈이다.
북미에서는 이미 이런 구조 변화가 현실화하고 있다. 삼성SDI는 최근 GM이 보유한 시너지셀즈 지분 49.99%를 인수해 합작공장을 단독 운영하기로 했다. LG에너지솔루션도 GM과 공동으로 추진한 미국 랜싱 공장과 스텔란티스와의 캐나다 넥스트스타에너지 지분을 잇달아 인수했다. SK온은 포드와 설립한 블루오벌SK를 각자 공장 체제로 전환했다. 국내 배터리 3사가 모두 북미에서 완성차 업체와 공동 투자한 생산거점을 단독 운영하는 사례를 확보한 것이다.
완성차 업체로서는 JV 정리가 전동화 투자 속도를 조절하는 수단이 된다. 전기차 판매가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조원을 추가로 투입해 배터리 공장을 공동 운영할 유인이 약해졌다. 지분을 매각하면 향후 투자와 운영 부담을 덜 수 있고 매각으로 확보한 재원을 하이브리드나 보급형 전기차처럼 상대적으로 수요가 견조한 분야에 재배치할 수도 있다.
배터리 업체는 정반대의 이점을 얻는다. 공장 운영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온전히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JV 체제에서는 생산계획과 물량이 특정 완성차 업체의 전기차 판매 전망에 사실상 종속됐다. 단독 체제로 전환하면 고객과 제품, 생산량, 투자 시점을 자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다른 완성차 업체의 주문을 받아 생산능력을 돌릴 수도 있고 전기차 수요가 위축되면 일부 라인을 ESS용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 시장 상황에 따라 생산 포트폴리오를 재편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지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 JV 재편은 단순한 지분 거래라기보다 배터리 생산시설의 주도권이 완성차 업체와의 공동 경영에서 배터리 업체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같은 생산 유연성을 뒷받침하는 것이 북미 ESS 시장이다. 전기차용 배터리 주문이 감소하더라도 ESS 수요를 끌어와 유휴 생산능력을 흡수할 수 있다. 특정 완성차 업체의 판매 실적에 공장 가동률이 좌우되는 위험을 낮출 수 있다는 의미다.
국내 배터리 3사도 이미 ESS를 북미 생산거점의 새로운 수요처로 활용하고 있다. 삼성SDI는 GM과의 합작공장을 단독 운영하면서 전기차뿐 아니라 ESS 등 다양한 수요에 대응한다는 계획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단독 체제로 전환한 랜싱 공장과 넥스트스타에너지를 ESS 생산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SK온 역시 북미 일부 생산라인을 ESS용으로 전환하며 전기차 중심의 생산구조를 다변화하고 있다.
미국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도 단독 운영의 경제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미국에서 생산·판매하는 배터리 셀에는 일정 요건을 충족할 경우 1kWh당 최대 35달러의 생산세액공제가 적용된다. JV에서는 지분과 계약 조건에 따라 세제 혜택의 경제적 귀속이 달라질 수 있지만 단독 운영으로 전환하면 해당 공장에서 발생하는 세제 혜택을 배터리 업체가 보다 직접적으로 향유할 수 있다.
다만 공장을 확보했다고 수익성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JV의 핵심 장점이었던 확정 물량이 사라지는 만큼 새로운 고객을 확보하지 못하면 높은 고정비를 배터리 업체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ESS 전환도 만능 해법은 아니다. 생산설비를 변경하는 데 추가 비용이 들고, ESS 시장 역시 공급 과잉이나 가격 경쟁이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
결국 단독 운영의 성패는 공장을 얼마나 많이 확보했느냐가 아니라 확보한 생산능력을 시장 변화에 맞춰 얼마나 유연하게 운용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JV 재편 시점이 다소 늦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기차 캐즘이 본격화한 2023년 이후 2~3년이 지나서야 북미 생산거점 재편이 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배터리 공장은 단순히 지분을 사고파는 방식으로 정리하기 어렵다. 수조원이 투입된 생산시설에 대출과 공급계약, 각종 투자 약정까지 얽혀 있어 구조를 재편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한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완성차 업체들은 전기차 투자 계획을 전반적으로 다시 보고 있는 상황"이라며 "배터리 공장 역시 당장 필요한 생산능력만 남기고 투자 부담을 줄이려는 움직임의 하나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수조원이 투입된 공장은 단순히 지분만 사고파는 문제가 아니라 자산과 대출, 각종 계약 관계까지 함께 정리해야 한다"며 "완성차 업체와 배터리 업체 간 협상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북미 배터리 JV의 잇단 단독 전환은 전기차 산업의 경쟁 구도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기차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때는 완성차 업체와 배터리 업체가 생산능력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성장세가 둔화된 지금은 시장 변화에 맞춰 생산능력을 재배치하고 가동률을 방어하는 능력이 새로운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결국 K배터리 앞에 놓인 과제는 '누구와 공장을 지을 것인가'에서 '확보한 공장을 누구를 위해, 무엇을 만들며 얼마나 효율적으로 가동할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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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고지혜 기자
kohjihye@newsw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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