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첩한 달리기 성능 갖추면서 전비 효율성도 우수'전기차 고질병' 멀미 줄인 회생제동 기능 인상적3000만원대로 품을 수 있는 '똑똑한 전기차' 뜬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지난 3일 인도네시아에 지은 전기차 배터리셀 공장 'HLI그린파워'의 준공식에서 했던 말이다. 지금은 전기차가 잘 안 팔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전기차 대중화의 속도가 다시 빨라져 전기차가 잘 팔릴 것이라는 나름의 전망이 담긴 발언이었다.
정 회장의 말처럼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현재 분위기는 어둡다. 전기차를 사고 싶었던 사람들은 이미 웬만큼 구매를 마쳤고 신차 구매 수요가 등장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 때문인지 전기차 판매량은 갈수록 급감하고 있다.
기자는 정 회장의 '캐즘 극복 가능' 발언을 정리하며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말을 했을까? 뭔가 비장의 무기라도 있는 건가?"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그 의문을 풀어줄 실마리를 한 달도 안 돼서 찾았다. 캐즘을 깰 수 있는 전기차 대중화의 첨병을 만났기 때문이다.
2021년 출시된 EV6, 지난해 첫 차가 나왔던 EV9에 이어 기아가 국내 시장에 세 번째로 내놓은 EV 시리즈 전기차 EV3다. 기자가 만나본 EV3는 현재의 전기차 캐즘을 극복할 만한 무기로서 확실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할 만한 차였다.
EV3는 기아, 나아가 현대차그룹이 일시적 침체에 빠진 전기차 시장 분위기를 일신하고 전기차 대중화의 속도를 더 빠르게 앞당기기 위해 내놓은 대중 보급형 신차다.
현대차그룹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인 E-GMP를 뼈대로 둔 EV3는 덩치로 볼 때 소형 스포츠 다목적 자동차(SUV) 정도의 크기를 갖췄다. 기아가 판매 중인 셀토스와 거의 같은 수준의 덩치다. 셀토스와 비교한다면 EV3의 전폭과 앞뒤 바퀴 간 거리가 5㎝ 넓고 길다.
460리터의 트렁크 용량은 소형 SUV급 차의 트렁크 치고는 다소 적을 수 있다. 덩치가 비슷한 셀토스의 트렁크 용량이 최대 498리터인 것을 고려한다면 EV3의 트렁크 용량이 적은 것은 맞다. 하지만 웬만한 수준의 화물을 싣는 것에는 크게 무리가 없어 보였다.
본격적으로 달려볼 시간이다. 기자는 서울 성수동 서울숲에서부터 EV3를 타고 강원 춘천시를 경유해서 푸르른 동해가 눈앞에 펼쳐진 속초시까지 약 210㎞를 달렸다.
출발 당시 EV3 계기판에 적힌 배터리 잔량은 96%였다. 배터리가 다 닳을 때까지 갈 수 있는 최대 거리는 711㎞였고 최소 거리는 302㎞였다. 보통의 운전 습관으로 안정적 주행이 가능한 거리는 483㎞였다. 기아가 공개한 EV3 스탠다드 모델의 1회 충전 시 최대 주행 거리는 350㎞, 롱레인지 모델의 최대 주행 거리는 501㎞다.
기아 측은 "최대 거리는 시내에서 연비 주행을 하는 조건으로 산출한 수치이고 최소 거리는 가혹한 조건에서 고속 주행했을 때 산정한 수치"라고 설명했다.
EV3를 시승했던 날 서울의 낮 기온은 31도였다. 아침까지 내린 장맛비 때문에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습도가 높아서 에어컨을 마음껏 켜고 달렸다.
시내 주행 구간에서는 새롭게 달라진 아이 페달(i-PEDAL) 3.0 기능을 경험했다. EV3부터 새롭게 탑재된 아이 페달 3.0 기능은 핸들 뒤편 패들 시프트로 해당 기능을 켜고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면 가동되는데 운전자의 취향에 따라 회생제동 수준 조절이 가능하다.
1~3단계까지 조절이 가능한데 단계가 낮을수록 회생제동량이 적다. 회생제동이란 차의 주행 속도가 줄어들면서 발생하는 운동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꿔서 배터리에 충전하는 자체 충전 방식을 뜻한다. 쉽게 말해 속도를 줄일수록 배터리가 다시 채워지는 셈이다.
회생제동 기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 효율적인 전비 운전이 가능하다. 그러나 '육참골단(큰 승리를 따내기 위해 작은 손실을 감수한다)'이라는 사자성어처럼 전기차의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문제와 직면해야 한다. 바로 멀미다.
회생제동 기능이 강하게 작동하면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기 때문에 평소 멀미를 잘 안 하는 사람도 어지럼증, 두통, 메스꺼움 등 멀미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다. 기자도 가족이 전기차를 몰고 있고 그 차에 여러 번 함께 타봤기에 이 현상을 매우 잘 알고 있다.
EV3의 아이 페달 3.0 1단계는 회생제동 강도가 약하기에 감속 속도 또한 크지 않다. 당연히 차내 승객에게 전달되는 불편함도 적다. 반대로 3단계로 설정하고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면 주행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꿀렁거리는 느낌이 강한 편이었다.
멀미를 경험하기 싫은 사람들에게는 아이 페달 기능을 아예 끄거나 1단계 수준에서 쓸 것을 권장한다. 반대로 멀미를 감수하더라도 차의 전비를 생각하는 운전자라면 3단계 수준으로 설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서울양양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주행 모드를 스포츠로 바꾸고 시원하게 내달렸다. EV3가 낼 수 있는 최고 출력은 204마력이다. 4기통 내연기관 엔진을 얹은 중형 세단과 출력이 맞먹는다. 비슷한 덩치의 셀토스보다는 확실히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다. 기본적으로 민첩하게 달리는 성능을 지닌 덕분에 치고 나가는 맛이 만족스러웠다.
운전석에는 12인치 윈드실드 타입의 헤드업 디스플레이(HUD)가 장착돼 있어서 운전을 하면서 현재 주행 속도와 길 안내 등 주행 관련 핵심 정보를 손쉽게 습득할 수 있다.
특히 EV3는 현대차그룹 커넥티드 카 서비스(CCS) 서버 데이터와 실시간으로 연동돼 HUD를 통해 '전방 사고 발생' 등 실시간 알림도 제공한다. 실제로 돌발 정보를 확인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접촉 사고가 난 현장을 발견했다. 달리기도 잘하는데 똑똑하기까지 하다.
카 오디오의 음량을 잠시 줄이고 차내 주행 소음을 들어봤다. 고속으로 달리다 보면 차 하부에서 적잖은 소음이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EV3는 하부 소음이 현저하게 적었다. 이는 차 곳곳에 꼼꼼하게 부착된 흡음·차음재 덕분이다.
소음이 적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다시 오디오 소리를 크게 높일 차례다. EV3에는 메리디안 프리미엄 사운드 시스템이 탑재된 EV6, EV9과 달리 하만카돈의 프리미엄 사운드 시스템이 장착됐다. 웅장한 음악 소리가 운전의 재미를 더욱 배가시켰다.
중간 기착지에서는 흥미로운 엔터테인먼트 기능 체험도 했다. EV3에서는 전면 디스플레이로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활용할 수 있다. 벽돌 깨기 퀘스트 등 8가지 게임을 즐길 수 있는데 지루한 급속 충전 시간을 때울 수 있는 확실한 대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V3에는 현대차그룹의 고속 주행 보조 시스템인 HDA2가 탑재돼 있다. 이 시스템을 활용하면 달리는 차가 차선 중앙에 따라가도록 조향 기능을 알아서 제어한다. 물론 오랫동안 핸들에서 손을 아예 떼면 안 된다. 바로 "핸들을 잡으십시오"라는 경고문이 뜬다.
먼 길을 달려 동해가 보이는 속초시내 문턱에 다다랐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서 맞이한 첫 번째 교차로에서 스마트 회생제동 시스템 3.0 기능을 경험했다. 이 기능은 자율주행과 회생제동 기능이 합쳐진 시스템으로 칭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을 활용하면 다양한 상황에서도 자동 감속이 가능한데 스마트 회생제동 3.0 기능을 켜고 가속 페달에서 완전히 발을 뗀 채로 속도가 느려졌고 도로의 상황과 앞차와의 거리를 알아서 감지하더니 비로소 스스로 정지했다. 매우 인상적인 기능이었다.
목적지로 정한 속초 외옹치항에 도착했을 때 다시 계기판을 바라봤다. 출발 때 96%였던 배터리 잔량은 210㎞를 쌩쌩 달리고도 20% 정도밖에 닳지 않았다. 서울에서 춘천을 거쳐 속초까지 온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도 기력이 남을 정도로 배터리 잔량이 충분했다.
기자가 3시간여를 운전하면서 기록한 전비는 ㎾h당 6.3㎞였다. 물론 전기차의 주행 거리를 크게 잡아먹는 히터와 달리 에어컨은 전기차의 주행 거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그래도 온갖 부가 기능을 다 켜고도 이 정도의 효율성을 뽐낸 차라면 인기를 끌 만한 매력이 충분하다고 볼 수 있겠다.
EV3의 매력을 배가시켜 주는 또 다른 특징은 '만만한 가격'이다. 기아가 책정한 EV3 소비자 가격은 4208만원부터 시작한다. 이 가격은 보조금 혜택을 받기 전의 값이다.
지역별로 차등화된 전기차 구매 보조금을 반영한다면 실제 구매 가격은 3000만원대로 내려간다. 스탠다드 모델은 3000만원대 초중반에도 구매가 가능하며 롱레인지 모델도 4000만원 미만의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을 전망이다.
이제 다시 정의선 회장의 '캐즘 극복' 발언을 곱씹어볼 대목이다. EV3를 직접 몰아보니 정 회장의 발언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전기차 시장의 수요 둔화를 타개할 만한 EV3라는 확실한 무기가 있기에 자신 있게 캐즘 극복을 공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V3가 차갑게 식어버린 전기차 시장의 분위기를 바꾼다면 정 회장의 공언처럼 전기차 수요 둔화는 눈 녹듯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EV3의 질주가 메가톤급 태풍이 될 것인지 아니면 찻잔 속의 태풍이 될 것인지 미래를 지켜보도록 하자.
뉴스웨이 정백현 기자
andrew.j@newsw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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