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공시'는 중요하다. 공시의 자기보정(Self-correction) 기능 때문이다. '부패(腐敗)'는 어둠을 좋아하고, 청렴(淸廉)은 밝음을 좋아하는 이치와 공시 효과는 궤를 같이한다. 닭-달걀 논쟁일지 모르나, ESG 경영의 첫 단추는 'ESG 성과의 투명하고 가감 없는 공시'에서부터 끼워져야 한다.
예를 들어 보겠다. 필자는 1970년대에 남녀공학인 중학교에 다녔다. 당시만 해도 남녀공학 중학교는 서울시 전역에서 손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우리 학교의 남학생들은, 학급은 달랐어도 여학생들과 운동장을 공유하는 특권을 가졌다. 때로는 이 특권으로 인해 인근 남자 중학교 친구들의 질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우리 교장선생님은 학력 증진에 유난히 진심이었다. 급기야 학생들의 공부 분발을 촉구하기 위해 전교생 성적을 담벼락에 게시했다. 전교 일 등부터 꼴등까지 모든 학생의 성적이 투명하게 '공시'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남녀학생 모두 하루 한 번은 가는 화장실 옆 벽, 가독성 가장 높은 곳을 이용했다. 캠퍼스 커플들은 희비 쌍곡선을 그렸다. 성적이 저조한 남학생들은 여자 친구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 커플은 그것이 자극제가 되어 공부에 매진했다. 최상위 학생들은 이성 친구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당시 우리 학교의 모의고사 성적은 전국에서 최상위권이었다. 뇌피셜이지만 필자는 그 성적공시 효과 때문이라고 믿는다. 교장선생님은 '공개해서 부끄럼 주기(Name & Shame)' 전략으로 사춘기 남녀 학생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들었고, 그것을 통해 학업 성취욕을 자극했던 치밀한 교육 책사(策士)가 아니었을까.
지난 4월 30일 한국 회계기준원 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는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의 초안을 발표했다. KSSB가 밝힌 대로 ISSB를 베이스라인으로 삼아 글로벌 정합성과 국내 수용 가능성을 고려한 초안이다. 투자자에 소구할 공시 가이드라인이란 점에서도 뜻깊다. 다만 공시 시점과 그 대상, 로드맵, 법정 공시 여부, 인증 문제, 스코프(Scope)3 의무화 등 주요 내용들이 미포함 되었기에 향후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을 거친 최종안 내용까지 예의주시할 작정이다.
그러나 금융위원회 산하 정부 기관이 지속가능성 공시 초안을 발표했다는 점만으로도 기념비적이다. 기업들의 탈탄소 경영, ESG 경영을 독려할 첫 단추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기후변화 대응 및 탈탄소 이슈는 우리 기업에 불편한 진실이지만 골든타임이 존재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러함에도 지난 십수 년 우리나라에는 각종 관련 정책과 로드맵만 무성했고 실행과 성과는 미진했다. 스타트라인에서 십수 년째 몸풀기만 하는 육상 선수를 닮았다.
주지하듯 우리나라의 주력산업은 전기·전자, 디스플레이, 반도체, 석유화학, 자동차, 철강, 기초소재 등 탄소 과(過)배출이자 난(難) 감축 섹터들이다. 이 산업에서 우리와 경쟁 관계에 있는 일본, EU, 북미의 선진국들과 글로벌기업들은 2030년을 기점으로 탈탄소 설비와 기술을 현장에 배치하고 상용화한다는 전략이다. 그리고 치밀하게 추진하며 이미 저만큼 앞서가고 있다.
이러한 선진국 기업들의 저의는 산업의 판을 확 바꾸고, 게임 체인지를 통해 시장 우위를 점하려는 것이다. 이 예정된 미래, 창밖에 와 있는 미래를 불편하다고 해서 회피한다면 우리 글로벌기업들과 제조업 경쟁력 세계 3위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둡다.
모쪼록 이번 지속가능성 공시기준 초안 발표가 우리 산업 대전환의 기폭제가 될 수 있길 바란다. 하지만 모두(冒頭)에서 언급했듯, ESG 공시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공시를 첫 단추로 해서 계속 단추를 꿰어 나가야 한다. 그간 ESG워싱으로 별칭 됐던 허위 공시를 이제 그만 그치고, 탈탄소 전략 수립-실행-적용-공시-ESG 투자자로부터의 피드백 등 선순환 고리를 완성해야 한다.
하지만 기업들이 이렇게 묻는다면 답변은 궁색하다. '국내 투자자들이 우리 공시를 보고 피드백을 주나요? ESG 성과 개선을 위해 자원을 배치했는데, 투자자들로부터 어떤 보상(cost of capital)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이쯤 해서 다시 교장선생님의 전략을 소환해 본다. 성적을 투명하게 공시하되, 가장 가독성 높은 공간을 활용해서, 가장 예민한 이해관계자인 이성 친구의 관여 메커니즘을 작동시켰고, 그 결과 성적 상승효과를 거뒀던 교장선생님의 전략이 작금의 대한민국 지속가능성 경영에도 접목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답은 명약관화하다. 기업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해관계자인 기관 투자자들이 기업의 ESG 공시 성과를 반영하여 투자하고, 관여하고, 의결권도 행사해야 한다. 정부는 투자자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시 채널도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이 구축, 작동되어야 기업의 지속가능성 성과 개선의 유인 체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것 없는 일방적 공시 강요는 기업의 볼멘소리와 결국 ESG워싱의 유인만을 키울 뿐이다. 메아리 없는 외침은 괴롭고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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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임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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