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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기 - 업계의 대명사가 된 비결

[창업자로부터 온 편지]우상기 - 업계의 대명사가 된 비결

등록 2019.01.24 15:00

수정 2019.01.24 15:07

이성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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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창업자로부터 온 편지’는 한국 경제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대기업 창업자들부터 미래를 짊어진 스타트업 CEO까지를 고루 조망합니다. 이들의 삶과 철학이 현직 기업인은 물론 창업을 준비하는 젊은 세대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상기 - 업계의 대명사가 된 비결 기사의 사진

우상기 - 업계의 대명사가 된 비결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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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기 - 업계의 대명사가 된 비결 기사의 사진

우상기 - 업계의 대명사가 된 비결 기사의 사진

우상기 - 업계의 대명사가 된 비결 기사의 사진

우상기 - 업계의 대명사가 된 비결 기사의 사진

우상기 - 업계의 대명사가 된 비결 기사의 사진

우상기 - 업계의 대명사가 된 비결 기사의 사진

우상기 - 업계의 대명사가 된 비결 기사의 사진

우상기 - 업계의 대명사가 된 비결 기사의 사진

우상기 - 업계의 대명사가 된 비결 기사의 사진

우상기 - 업계의 대명사가 된 비결 기사의 사진

사무기기,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복사(합)기인데요. 복사기, 하면 떠오르는 회사도 있지요. 바로 ‘신도리코’입니다. 그렇다면 이 신도리코, 과연 어떻게 대한민국 사무기기의 대명사가 됐을까요?

시작은 60여 년 전부터. 당시 갓 마흔을 넘긴 개성 출신의 우상기 창업회장과 함께였지요.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던 그는 일본의 복사기 광고를 보고는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물건임을 직감합니다.

하지만 자체 제작은 어려웠던 게 사실. 우 회장은 1960년 ‘신도교역’을 세우고 일본에서 복사기를 수입해 팝니다. 이마저도 미도파백화점 전시 때 구경꾼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을 만큼, 당시엔 획기적인 기기였습니다.

무역회사에 그치고 싶진 않았던 우 회장, 연구 개발 끝에 1964년 최초의 국산 복사기 Ricapy 555를 만들어냅니다. 덕분에 신도교역의 사세도 크게 확장됐지요. 1969년엔 국내 기술로 만든 첫 전자 복사기 BS-1 개발에도 성공합니다.

1968년엔 일본 리코사와 제휴, 우리가 잘 아는 신도리코로 재탄생합니다. 기술 개발에 대한 우 회장의 관심도 업그레이드됐지요. 전체 직원의 20%가 기술연구소 소속이었을 정도. ‘최초’란 수식어도 점차 늘렸습니다.

▲1973년 국내 최초의 전자계산기 RICOMAC 1621 개발
▲1975년 국내 최초의 보통용지식 복사기 DT 1200 개발
▲1981년 국내 최초의 팩시밀리 FAX 3300H 개발

▲1985년 아산공장 가동
▲1991년 국내 최초의 독자설계 복사기 FT 1000 개발

1990년대는 복사기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 신도리코는 NT 4000 시리즈를 내놓으며 세계 시장을 석권합니다. 복사기의 골칫거리였던 걸린 종이를, ‘세계 최초’로 자동 제거할 수 있도록 만든 게 비결이었지요.

이렇듯 기술 트렌드가 시시각각 바뀌는 분야임에도 뒤처지긴커녕 트렌드를 주도하기까지 했다는 점, 많은 이들이 신도리코를 높이 사는 요인인데요. 업계에선 우 회장의 ‘사람에 대한 투자’가 그 원동력이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기술 개발 인력에의 투자, 생산직 노동자를 위한 시설 투자 등 직원에 돈을 아끼지 않는 건 우 회장을 상징하는 경영철학입니다. IMF 외환위기 때 성수동 본관 및 공장을 증축한 건 그 철학이 드러난 대표적 사례.

이 공사가 유명한 이유는 단지 첨단 생산설비만 들인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려 실내 농구장이 포함된 체육관에, 미술관과 정원까지 들여놨던 것. 전체 공간의 2/3 이상을 복리후생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셈입니다.

근무환경 개선, 필요성을 언급하긴 하지만 다른 현안을 챙기는 데 급급해 뒷전으로 미뤄두는 경영자가 대부분인데요. 우 회장은 다른 걸 제쳐두고 오히려 이를 가장 우선시한 것이지요. 말 대신 행동으로 말입니다.

스케일이 큰 챙기기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신도리코의 중역들은 오후 4시쯤 손수 군고구마 한 가마니를 들고 와 기술 개발에 열중인 직원들에게 나눠주던 우 회장의 초창기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고 하지요.

이렇듯 우 회장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직원이 일하기 좋은 환경 만들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가 작고한 2002년, 한 신문은 사설을 통해 우 회장의 그런 부분을 언급하며 영면을 기린 바도 있습니다.

“창업 이후 단 한 차례의 노사분규가 없었던 것과 1997년 IMF 때 인원감축을 하지 않았던 사례도 삼애정신(나라와 직장과 사람을 사랑한다)의 결실이었다.” - 2002년 3월 20일자 한국경제 사설 中

신도리코 역시 사람에 대한 투자가 곧 회사의 성장이라는 창업회장의 정신을 여전히 이어가는 중인데요.

“창업자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이한 기업, 유한양행과 신도리코.” - 퍼시스 손동창 회장

기업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모인 곳, 그래서 사람한테 잘해야 하는 건 기본 중 기본이란 사실. 사무기기의 편리함 이상으로 소중한, 우 회장의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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